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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s Thoreau 1817~1862)는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와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을 펼친 마틴 루터 킹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널리 알려 있다져 있다. 간디는 소로를 위대한 스승이라 평하며 시민불복종에서 자신이 추진하는 운동의 이름을 땄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최초로 일어난 비폭력 저항운동인 '사티아그라하(진리를 향한 열정) 투쟁'을 시작, 납세거부, 영국 상품 불매 등의 방식으로 8년 동안 차별법 폐지 운동을 펼쳐 나갔다. 결국 이는 아시아인 구제법 제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인도인 차별법을 폐지시켰다.

간디는 정부가 시민을 돌보기 위해서가 아닌 그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세금을 쓴다면 납세는 온당치 못한 일이며 이런 경우 정부의 비협력은 위헌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비정상적인 정부의 행위에 대해 협력하지 않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역설했다.

이는 다시 마틴 루터 킹에게 영향을 끼친다.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힘이 있다는 것에 근거, 정부에 끈기 있게 저항해 나가는 것을 본받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회 개혁을 추진해나간다. 인간은 정의롭지 않은 법에 복종하기를 거부할 도덕적 책임이 있다며 흑인 인권 운동의 선봉에 선다.

시민불복종의 핵심 정신은 국가가 불의한 일을 시민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정부에 대한 개인의 저항은 합법적이라는 데에 있다. 소로의 이런 주장을 접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정부 조치에 비폭력 불복종의 모범을 보인 그를 극찬했다. 이 때문에 소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한때 자신의 집에서 소로를 기거하게 해준 하버드대 동문이자 사상가 랠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는 '헨리 데이비스 소로의 삶'이란 글을 통해 소로의 생애와 성격, 성향에 대해 남겼다.

이에 따르면 소로는 철저하게 금욕적이었으며 자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했다. 정직을 지키기 위해 남들보다 힘든 길을 걸으면서도 이에 대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철저하게 청교도적 삶을 살았고 모든 행위를 이상적 근거에 따라 해결하고 싶어 했다.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이나 이론을 펼치려면 금전적으로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소로는 스위스 출신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 역시 "후원을 받는 순간 예속된다"고 말하며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가기 위해 독립적일 것을 강조했다. 또한 소로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1938~2002)도 소로처럼 국가의 권한은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하버드 철학과 교수 재직시절 국가로부터 연구 지원금을 일절 받지 않고 '최소정부론'을 내 놓았다.

소로는 운둔자였지만 자신이 아끼는 젊은이들과는 순수한 마음으로 잘 어울렸다. 자신의 주장을 쉽게 굽히지 않았고 오류는 비판, 실수는 지적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는 편협한 지식에 갇혀 있는 현학적인 사람이 아니었기에 자신의 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다. 에머슨은 이런 소로의 죽음 앞에서 '미국이 훌륭한 조국의 아들을 잃었다'고까지 표현한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 그의 영혼은 가장 고귀한 사회에 있어야 어울린다며 그곳이 어디든 지식과 덕성 그리고 아름다움이 있는 곳에서 안식을 찾을 것이라고 그를 추모했다.

이런 인격의 소유자였던 소로는 그의 성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저서 <시민불복종>을 통해 자신의 정부관을 피력해 놓는다. 정부는 국민들이 자신들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기에 기껏해야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피통치자들이 간섭을 가장 적게 받을 때 정부가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고 봤다. 그런데 정부는 이를 쉽게 망각한 채 현명하고 지적인 선지자를 돕지도 않고 오히려 탄압을 하는 잘못들을 쉽게 저지른다. 그는 정부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코페르니쿠스와 루터를 파문했던 인류 역사의 예를 들며 정부의 폭정을 설득력 있게 고발한다.

소로는 악한 국가 권력에 순응하는 선량한 시민들은 이에 따라 악해지기 마련인데 그들이 악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혁신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지식인들이 저급한 단계인 적폐 국가의 주권을 인정하느니 이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 신성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시민의 중요한 의무 중 하나는 바로 악한 정부에 협조하지 않는 것이며, 이것이 시민 스스로 악해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정당치 못한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에 대한 저항이야말로 정의에 원칙을 둔 국가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역설한다.

이렇게 소로가 주장하는 데에는 당시 미국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로는 멕시코 전쟁, 노예제도와 같은 일들은 정부 권력이 정당하게 쓰이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다고 봤다. 그러면서 미국이 텍사스를 click here 차지하기 위해 부당하게 멕시코와 전쟁을 벌이는 것을 문제 삼았고, 또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국민에게 인두세를 부과하는 것에 대해 부당하게 여겼다.

자신이 내는 세금이 살인 무기로 쓰이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납세를 거부했다. 시민 사회의 기본은 뭔가를 부당하게 뺏었다면 반드시 이를 돌려주는 것인데 미국 정부가 나서서 수탈만 하고 있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여겼다. 가만히 있는고 달라질 것은 없다고 판단 그는 정부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거하기 시작했다.

소로는 흑인 노예를 소유주에게 돌려주기 위해 정부가 만든 '도주 노예 송환법'을 비판하는 강의를 했다. 또한 흑인 노예들의 도주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조직망, 언더 그라운드 레일로드(Underground Railroad)에 참여했다. 이에 더 나아가 급진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하고자하는 존 브라운(John Brown, 1800~1859)을 공개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존 브라운이 일으킨 하퍼스 페리 습격 후 존 브라운을 위한 청원을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운이 처형을 당하자 이 상황을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것과 같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그러면서 노예 제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날이 오면 우리는 캡틴 브라운을 위해 목 놓아 울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며 그의 업적을 높게 평가했다.

소로가 이렇게 용기 있게 나설 수 있었던 것은 '한 사람으로서의 다수(a majority of one)'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주변 이웃보다 더 의로운 사람은 한 사람으로서 다수가 된다는 이론이다. 그 사람이 지닌 정의가 사회에 큰 파장과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우리 사회는 이러한 사람들이 필요하며, 이들을 보호하고 지지해 줘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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